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신약성서의 천사관은 후기 유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천사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사람에게 파견되고 꿈에 나타나며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수호천사를 하나씩 정해준다고 합니다. 각자의 수호천사는 그 사람이 가는 길마다 지켜주고 시중을 들어주며 또한 하느님께 기도를 전달해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수호천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마음속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수호천사의 말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호천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천사관에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교리는 한 가지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를 만드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영적인 세계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천사의 존재를 제4차 라떼란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신앙교리로 선언합니다. 하지만 천사의 본질과 역할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브리엘과 미카엘, 라파엘 천사 이외에 다른 천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9월 29일을 3대천사(大天使 ;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축일로, 또한 10월 2일을 수호천사 기념일로 제정하는 한편, 천사를 공경할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르신 천국이란 ‘천주의 어좌’를 말하는데, ‘하느님의 오른편’이란 영광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국이란 완전한 초자연적인 행복이 있는 장소와 행복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복락은 아무도 상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사건들을 통해서 신학자들은 천국의 복락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그리스도와 성모님, 그리고 의인의 영혼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뒤에는 의인의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데, 이때 얻게 되는 천국의 행복은 천사와 여러 성인, 그리고 지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나누는 공통의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우리 모두의 희망의 대상으로 공심판이나 육신의 부활 후에 의인들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인데, 한마디로 천국은 영원한 생명, 즉 끝이 없는 행복의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이미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실재라고 하겠으며, 사람이 하느님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인간에 의한 파괴와 살육,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바로 살아 있는 지옥 곧 생지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이란 하느님께서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죄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준비해둔 형벌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인생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허황된 교만과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거부할 때 발생하는 완전한 파멸인 것입니다.
이러한 지옥에는 실고(失苦)와 각고(覺苦)라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실고란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으로서, 하느님을 영원히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지옥의 벌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각고란 말 그대로 감각적으로 느끼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것은 마태오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는데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25장 41절)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각고란 뜨거운 불 속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지옥 불의 영원성에 대해서도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마태오복음 25장 46절)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 (요한 묵시록 19장 3절)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20장 10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성인은 “죽은 자리에서 회개하여 보속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후세에서 정화의 불로 정화될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죽은 후에 정화의 불을 당하지 않도록 현세에서 자신을 정화해 주시기를’ 기도 드렸다고 합니다.
지옥의 고통과 연옥의 고통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지만 연옥의 고통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고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죄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게 되는데, 현세에서 통회와 기도를 통해 죄가 정화된다면 연옥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받음으로써 죄가 정화됩니다.
즉 연옥에서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임으로써 벌에 대한 보상을 하고 죄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은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전구에 의해 단축될 수 있습니다.
연옥의 영혼들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로 인한 고통으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수호성인은 순교자의 묘지 위에 성당을 건립하고 그 순교자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관습에서 유래되었습니다.
3세기경까지는 순교자만이 성당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공인된 이후부터는 증거자와 주교 선교사와 성당의 창설자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십자가, 구세주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신비까지도 성당의 수호성인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수호성인을 모시게 된 것은 4세기 초부터 보편화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세례성사 때 받는 세례명입니다.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세례명으로 선택한 성인을 따라 살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이름이 바뀌면 그 사람도 변하게 된다는 성경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